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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 중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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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당 중종은 당 고종의 아들이자 측천무후의 세 번째 아들로, 두 차례 황위에 올랐다. 684년 1월에 즉위했으나, 측천무후의 섭정으로 인해 실권을 잡지 못하고 두 달 만에 폐위되어 유배되었다. 이후 측천무후가 물러나고 705년 2월에 복위했지만, 위황후와 안락공주에 의해 독살당했다. 재위 기간 동안 사성, 신룡, 경룡의 연호를 사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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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 중종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당 중종
당 중종 이현
이현(李顯)
(정보 없음)
소자(정보 없음)
묘호중종(中宗)
시호대화대성대소효황제(大和大聖大昭孝皇帝)
능호정릉(定陵)
출생현경(顯慶) 원년 11월 5일 (656년 11월 26일)
사망경룡(景龍) 4년 6월 2일 (710년 7월 3일) (53세)
신상 정보
이(李), (700년에 무(武)로 변경, 705년에 다시 이(李)로 변경)
이름현(顯), 677년에 철(哲)로 변경, 이후 다시 현(顯)으로 환원
가족 관계
아버지고종(高宗) 이치(李治)
어머니측천황후(則天皇后) 무씨(武氏)
배우자화사황후(和思皇后) 조씨(趙氏) (사망 675년)
폐후위씨(韋氏) (710년 사망)
자녀이중윤(李重潤)
이중복(李重福)
이중준(李重俊)
상제(殤帝) 이중무(李重茂)
장녕공주(長寧公主)
영태공주(永泰公主)
안락공주(安樂公主)
재위 정보
즉위684년 1월 3일 (1차)
폐위684년 2월 26일 (1차)
즉위705년 2월 23일 (2차)
사망710년 7월 3일 (2차)
연호사성(嗣聖) 684년
신룡(神龍) 705년 ~ 707년
경룡(景龍) 707년 ~ 710년
기타 정보
존호응천신룡황제(應天神龍皇帝)
묘호 (한자)중종(中宗)
시호 (짧은 이름)효화황제(孝和皇帝)
시호 (전체 이름)대화대성대소효황제(大和大聖大昭孝皇帝)

2. 생애

고종의 일곱째 아들로 태어났으며, 처음에는 주왕(周王)에 봉해졌다가 후에 영왕(郢王)으로 개봉되었다. 동복 형인 이홍이현(李賢)이 어머니 무씨에 의해 차례로 태자 자리에서 물러나면서 이현(李顯)이 황태자로 책봉되었다.

683년 말 고종이 붕어하자 684년 초 황제로 즉위했으나, 어머니인 무 태후가 실권을 장악하여 실권 없는 황제였다. 즉위 후 위황후의 아버지 위현정을 재상으로 삼으려다 배염 등 측천무후 측근들의 반대에 부딪혔고, 이 과정에서 불만을 표출한 발언이 빌미가 되어 즉위 55일 만인 684년 2월 26일 폐위되었다. 이후 여릉왕(廬陵王)으로 강등되어 균주, 방주 등지로 유배되었다.

그의 폐위 후 동생 이단이 잠시 즉위했지만 곧 폐위되었고, 690년 어머니 측천무후가 국호를 주(周)로 바꾸고 스스로 황제에 올라 무주 시대를 열었다. 유배 생활 동안 이현은 부인 위씨에게 크게 의지했다. 699년 측천무후에 의해 다시 황태자로 책봉되었고, 705년 신룡정변으로 측천무후가 퇴위하면서 다시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이로써 당나라 왕조가 복원되었다.

복위 후 중종은 위황후를 매우 신임하여 조정에 참여시켰고, 위황후와 딸 안락공주측천무후를 모방하여 권력을 장악하려 했다. 특히 안락공주는 스스로 황태녀가 되려 했고, 위황후 역시 제위를 넘봤다. 위황후와 안락공주의 권력 남용으로 조정의 혼란이 가중되었다.

710년 위황후와 안락공주는 자신들의 행위가 드러날 것을 우려하여 중종을 독살했다. 중종 사후 위황후는 어린 아들 이중무를 황제로 세우고 섭정을 시작했으나, 한 달 만에 이단의 아들 이융기와 중종의 누이 태평공주가 일으킨 정변으로 위황후와 안락공주는 살해되었다. 중종은 정릉에 매장되었다.

2. 1. 초기 생애와 첫 번째 즉위 (656년 ~ 684년)

이현(李顯)[10]656년 고종의 일곱 번째 아들이자, 고종의 두 번째 황후인 무후(훗날 측천무후)의 세 번째 아들로 태어났다. 657년 주왕(周王)에 봉해졌으며, 명목상 동도(東都) 낙주(洛州)(현 허난성 뤄양시)의 지사로 임명되었다.[10] 그의 위로는 동복 형인 이홍이현(李賢)이 있었으나, 두 형 모두 어머니 무후에 의해 태자 자리에서 물러나게 되었다.[10]

어린 시절, 왕자들은 닭싸움을 즐겼던 것으로 보인다. 661년 그의 형 영왕 이현(李賢)의 측근이었던 왕보가 이현(李顯)의 닭을 조롱하는 글(檄周王雞文중국어)을 썼다가 고종의 노여움을 사 쫓겨난 일이 있었다.[10] 674년에는 고종이 직접 황실 연회에서 악단을 둘로 나누어 이현(李顯)과 형 이현(李賢)이 경쟁하도록 하려 했으나, 재상 호처준이 왕자 간의 경쟁이 될 수 있음을 지적하여 중단되었다.[10]

주왕 시절, 이현(李顯)은 고모할머니인 장락공주와 조귀() 장군의 딸 조씨(趙氏)와 결혼했다. 그러나 고종이 장락공주 부부를 총애하자 이를 불쾌하게 여긴 무후는 675년 조씨 부인을 모함하여 내시부에 가두었고, 결국 조씨 부인은 굶어 죽었다. 무후는 또한 조귀를 괄주(括州, 현 저장성 리수이시) 지사로 좌천시키고 장락공주도 따라가게 했으며, 부부의 궁궐 출입을 금지했다.[10]

676년 토번이 당의 서부 변경을 침공했을 때, 이현(李顯)은 동생 상왕(湘王) 이륜(훗날 이단(李旦), 예종)과 함께 명목상 유심례()와 핍필하력(契苾何力|핍필하력중국어)이 지휘하는 원정군의 총사령관을 맡았으나, 실제로 출정하지는 않았다.[10] 677년 그는 영왕(郢王)으로 개봉되었고, 이름도 이철(李哲)로 바꾸었다. 수도 장안이 속한 옹주(雍州, 현 산시성 시안)의 지사로도 임명되었다.[10]

680년, 당시 황태자였던 형 이현(李賢)이 무후의 총애를 잃고 폐위되자, 이철이 새로운 황태자로 책봉되었다. 호처준과 유인궤 등이 태자 보좌를 맡았다.[10] 고종은 은둔 학자 전유암(田遊巖|전유암중국어)을 초빙하여 태자의 고문으로 삼기도 했다.[10] 681년 고종이 병으로 정무를 보기 어려워지자, 무후가 실권을 장악하고 이철에게 잠시 국정을 대리하게 하기도 했다.[10] 682년 이철의 태자비인 위씨가 아들 이충윤을 낳자 고종은 크게 기뻐하며 황태손(皇太孫)이라는 전례 없는 칭호를 내렸다. 그해 말 관중 지방에 기근이 들자 고종은 낙양으로 거처를 옮기고, 이철에게 장안의 유수를 맡겼다. 이때 이철은 놀이와 사냥에 몰두하여 설원초의 충고를 받기도 했다.[11]

683년 고종의 병세가 위독해지자 이철은 낙양으로 소환되었고, 고종은 임종 직전 중요한 국사는 천후(무후)와 상의하여 처리하고, 군국 중대사는 천후가 결정하도록 하는 유언을 남겼다.[11] 683년 12월 27일 고종이 붕어하고, 7일 뒤인 684년 1월 3일 이철은 황제로 즉위했다(중종). 연호는 사성(嗣聖)으로 정했다.[12] 그러나 유언에 따라 실권은 황태후가 된 무씨에게 있었다.[12]

중종은 즉위 후 황후가 된 위씨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 그는 장인인 위현정(韋玄貞|위현정중국어)을 재상급인 시중(侍中)에 임명하고, 유모의 아들에게도 5품 관직을 주려 했다. 이에 재상 배염이 반대하자 중종은 격분하여 "내가 천하라도 위현정에게 주지 못할 것이 무엇인데, 하찮은 시중 자리를 아끼겠는가?"라고 말했다.[12] 이 발언은 즉시 배염을 통해 무태후에게 보고되었고, 무태후는 크게 노하여 중종의 폐위를 결심했다.[12] 결국 중종은 즉위한 지 55일 만인 684년 2월 26일 폐위되어 여릉왕(廬陵王)으로 강등되고 균주(均州), 방주(房州) 등지로 유배되었다.[13] (일부 기록에는 2월 27일로 기록됨[14]) 폐위될 때 중종이 "내가 무슨 죄를 지었는가?"라고 묻자, 무태후는 "네가 천하를 위현정에게 주려 했으니 어찌 죄가 아니겠는가?"라고 답했다고 전해진다.[13] 중종이 폐위된 후 동생인 예왕(豫王) 이단(예종)이 황제로 즉위했다.[14] 황태손이었던 이충조 역시 서인으로 강등되었다.[14]

2. 2. 유배 생활과 복위 (684년 ~ 705년)

684년 2월 26일, 즉위한 지 불과 55일 만에 이현은 어머니 측천무후에 의해 폐위되었다. 그는 여릉왕(廬陵王)으로 강등되어 처음에는 방주(房州, 현재 후베이성 스옌시)로, 이후 균주(均州, 현재 스옌시)로 유배되었다. 균주에서는 과거 그의 숙부인 이태가 유배되었던 곳에 가택 연금되었다. 685년에는 다시 방주로 거처를 옮겼다.

유배 생활은 고난의 연속이었다. 유배지로 향하는 도중 부인 위황후는 딸을 낳았는데, 아기를 감쌀 것이 없자 이현은 자신의 옷을 벗어 덮어주었다. 이를 기리기 위해 딸의 이름은 이과아(李裹兒, "감싸인 아이"라는 뜻)로 지어졌으며, 부부는 이 딸을 매우 아꼈다.

이현은 유배 기간 내내 죽음의 공포에 시달렸다. 이는 어머니 측천무후가 과거 형 이홍을 독살했다는 의혹(675년)이 있었고, 또 다른 형 이현에게 자살을 강요(684년)했던 전례가 있었기 때문이다. 수도 뤄양에서 황제의 사자가 도착할 때마다 그는 자신에게 해로운 소식이 아닐까 두려워하며 자살까지 생각했다. 그때마다 위황후는 좋고 나쁜 운명에는 정해진 패턴이 없으니, 어차피 죽을 목숨인데 굳이 서두를 필요가 있겠냐며 그를 위로하고 격려했다. 이러한 역경 속에서 부부의 정은 더욱 깊어졌고, 이현은 위황후에게 만약 다시 햇빛을 보게 된다면, 당신이 무엇을 하든 막지 않겠다고 약속하기도 했다.

유배 중인 이현은 측천무후의 통치에 반대하는 세력들에게 상징적인 존재로 여겨졌다. 684년이경업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그의 복위를 명분으로 내세웠으며, 687년 양초성(楊初成)이나 689년 고종의 사촌인 포양공(鄱陽公) 이은(李諲) 등도 비슷한 주장을 펼쳤다.

690년, 측천무후는 아들 예종으로부터 제위를 넘겨받아 국호를 주(周)로 바꾸고 스스로 황제에 올라 무주 시대를 열었다. 예종은 황사(皇嗣)라는 이례적인 지위로 격하되었고, 이현의 신분에는 당분간 변화가 없었다. 그러나 699년(성력 2년), 여러 정치적 상황 변화 속에서 측천무후는 이현을 뤄양으로 불러들여 다시 황태자로 책봉했다.

705년(신룡 원년), 재상 장간지 등이 주도한 신룡정변이 일어나 측천무후는 퇴위 압력을 받게 되었다. 결국 705년 2월 23일, 측천무후는 황태자 이현에게 제위를 물려주었고, 이로써 당나라 왕조가 다시 부흥하게 되었다. 이현은 15년간의 유배와 태자 생활 끝에 다시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2. 3. 두 번째 즉위와 비극적 최후 (705년 ~ 710년)

705년 초, 측천무후가 병으로 위독해지자 재상 장간지, 최현위 및 관리 경휘, 환언범, 원수기 등은 측천무후의 총애를 받던 장역지와 장창종 형제를 제거하고 중종을 복위시킬 계획을 세웠다. 그들은 장군 이다조 등을 설득하여 2월 20일[19]에 정변을 일으켜 장씨 형제를 살해하고 측천무후를 에 유폐시킨 뒤, 황제 이현에게 양위하도록 압박했다. 705년 2월 23일, 이현은 다시 황제(중종)로 즉위하여 당나라 왕조를 복원했다.

복위 후 중종은 이전과 달리 실질적인 권력을 행사하려 했으나, 실제로는 황후인 위황후와 그녀의 딸 안락공주가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중종의 누이인 태평공주 역시 황제의 총애를 받으며 이들과 권력 경쟁을 벌였다. 또한, 측천무후의 비서였던 상관완아는 중종의 후궁(소용)이 되었는데, 그녀는 측천무후의 조카인 무삼사와 불륜 관계였고, 위황후와 무삼사 사이의 관계도 주선했다. 상관완아와 위황후의 영향력 아래 무삼사는 중종의 신임을 받는 핵심 조언자가 되었다. 한편, 위황후는 중종의 살아남은 장남 이충복(후궁 소생)을 싫어하여 그를 모함했고, 중종은 이충복을 수도에서 먼 지방으로 좌천시켜 삼엄한 감시하에 두었다. 중종은 처음에는 동생 이단에게 황태자 자리를 제안했으나 이단이 거절하자, 다른 후궁 소생의 아들 이충준을 황태자로 책봉했다.

중종은 복위 직후 정변 공신 5명(장간지, 최현위, 경휘, 환언범, 원수기)을 요직에 임명했으나, 무삼사와 위황후는 이들의 세력이 너무 강하다고 지속적으로 중종에게 경고했다. 결국 705년 가을, 중종은 이들을 왕으로 봉하는 형식을 취하며 재상직에서 해임하여 실권을 박탈했다.

705년 겨울, 측천무후가 사망했다. 그녀의 황제 칭호는 사후에 폐지되고 황후로 복원되었으며, 중종은 그녀를 아버지 고종과 함께 건릉에 안장했다. 이곳에는 중종의 형 이현, 아들 이충윤, 딸 이선혜도 함께 묻혔다.

706년 봄, 위황후와 무삼사를 혐오하던 중종의 사위 왕동교(정안공주의 남편)가 무삼사 암살 및 위황후 폐위 음모 혐의로 처형되었다. 무삼사와 그의 측근들은 이 사건을 빌미로 앞서 실각했던 5명의 정변 공신들을 연루시켜 모함했다. 결국 다섯 공신은 모두 유배되었고, 유배지에서 사망하거나 살해당했다.

707년, 황태자 이충준은 안락공주와 그녀의 남편 무숭훈(무삼사의 아들)이 자신을 반복적으로 모욕하고 안락공주를 대신 황태녀로 삼으려 하자 분노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그는 이다조, 이사충 등과 함께 군사를 일으켜 무삼사와 무숭훈을 살해한 뒤, 상관완아, 위황후, 안락공주를 잡기 위해 궁궐로 진격했다. 그러나 반군은 궁궐 공격을 망설였고, 황실 근위대의 반격과 중종의 직접적인 회유에 군사들이 이탈하면서 반란은 실패로 돌아갔다. 이충준은 도주했으나 결국 살해되었다. 이 사건의 여파로 원로 재상 위원충 등도 연루되어 유배지에서 살해되었다. 위황후 측은 이단과 태평공주까지 연루시키려 했으나 실패했다.

이후 조정은 위황후, 안락공주, 장녕공주(중종과 위황후의 장녀), 위황후의 여동생, 상관완아, 그녀의 어머니 정씨 부인 등 강력한 여성들과 그 측근들이 지배했다. 이들은 공개적으로 뇌물을 받고 관직을 매매했으며, 중종은 중서성(中書省)과 문하성(門下省)의 승인 없이 이들의 추천을 받아 관리를 임명하는 등 인사 제도가 극도로 문란해졌다.

708년 겨울, 돌기시 내부의 분쟁 과정에서 수령 소갈과 당나라 사이에 갈등이 발생했다. 위황후의 측근들은 토번과 연합하여 소갈을 공격하도록 중종을 설득했는데, 이는 소갈의 경쟁자였던 아시나 충절이 뇌물을 바쳤기 때문이었다. 소갈은 선제공격으로 당나라 군대를 격파했으나, 이후 중종이 소갈의 지위를 인정하자 다시 당나라에 복속했다.

710년 봄, 중종은 조카 이수례의 딸 금성공주를 토번의 황제 만포제에게 시집보내 양국 간의 평화를 다졌다. 그러나 국내에서는 낭급, 연흠융과 같은 인물들이 위황후의 간통과 그녀의 추종자들이 당나라 조정을 어지럽히고 있다고 고발했다. 중종은 낭급의 처형을 명했으나, 연흠융이 재상 종초객에 의해 임의로 살해되자 불쾌감을 드러냈다. 이 일로 위황후와 그 추종자들은 불안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위황후는 관리 마진객, 양균 등과 간통하고 있었으며, 측천무후처럼 스스로 황제가 되기를 원했고, 안락공주는 황태녀가 되기를 원했다. 중종이 이러한 요구를 여러 차례 거절하자, 위황후는 안락공주 및 자신의 정부들과 공모하여 중종을 독살하기로 결정했다. 그들은 케이크에 독을 넣어 중종에게 먹였고, 중종은 710년 7월 3일에 붕어했다.

중종 사후, 위황후는 중종의 어린 아들인 온왕 이충모를 황제로 즉위시키고 자신은 황태후로서 섭정을 시작하며 권력을 장악했다. 그러나 한 달도 채 지나지 않아 태평공주와 이단의 아들인 임치왕 이융기가 정변을 일으켜 위황후와 안락공주를 살해했다. 이후 이단이 상제를 폐위시키고 다시 황제(예종)로 즉위했다. 중종은 황실 묘역인 정릉에 안장되었다. 예종은 위황후가 중종과 함께 묻힐 자격이 없다고 판단하여, 중종이 사후에 황후로 추존했던 첫 번째 부인 조씨(사망 당시 왕비)와 합장하려 했으나 조씨의 시신을 찾을 수 없었다. 결국 조씨의 영혼을 불러 중종과 함께 하도록 하는 의식을 거행하는 것으로 대신했다.

3. 가족 관계

3. 1. 황후

봉호시호이름(성씨)별칭재위년도생몰년도국구(장인/장모)능묘비고
영왕비(英王妃)화사황후
(和思皇后)
조씨(趙氏)[21](추존)? ~ 675년조괴(趙瑰)
상락공주
(고조의 딸)
[22]
폐황후(廢皇后)위씨(韋氏)[23]684년
705년 ~ 710년
? ~ 710년풍헌혜왕(鄷獻惠王)
위현정(韋玄貞)
풍왕부인(鄷王夫人)
최씨(崔氏)
[24]


  • 황후: 위황후 - 사후에 폐위됨
  • * 차남: 의덕태자 이중윤
  • * 넷째 딸: 장녕공주
  • * 다섯째 딸: 영수공주
  • * 일곱째 딸: 영태공주 이선혜
  • * 여덟째 딸: 안락공주 이과아

3. 2. 후궁

wikitext

봉호(시호)별칭이름(성씨)생몰년도비고
귀비(貴妃)정씨(鄭氏)
혜문소용(惠文昭容)소용(昭容)상관완아(上官婉兒)664년 ~ 710년[25]
귀비(貴妃)양씨(楊氏)
숙비(淑妃)
덕비(德妃)
소의(昭儀)진씨(陳氏)
충의(充儀)염씨(閻氏)
충용(充容)육씨(陸氏)
수의(修儀)최씨(崔氏)


3. 3. 황자

wikitext

순서봉호시호이름생몰년도생모자식비고
장남초왕(譙王)이중복(李重福)680년 ~ 710년생모 미상[26][27]
차남황태자(皇太子)의덕(懿德)이중윤(李重潤)683년 ~ 701년위씨[28][29]
3남황태자(皇太子)절민(節愍)이중준(李重俊)684년 ~ 707년생모 미상[30]1남[31]
4남양왕(襄王)상황제(殤皇帝)이중무(李重茂)698년 ~ 714년생모 미상[32][33]


3. 4. 황녀

wikitext

순서시호(봉호)이름생몰년도생모부마비고
장녀신도공주
(新都公主)
불명? ~ ?불명진국공(陳國公) 무연휘(武延暉)[34]
차녀의성공주
(宜城公主)
불명? ~ ?불명위군개국공(魏郡開國公) 배손(裴巽)[35]698년 하가.
3녀정안공주
(定安公主)
불명? ~ 733년불명낭야충장공(琅邪忠壯公) 왕동교(王同皎)
위탁(韋濯)
최선(崔銑)[36]
왕동교 사후 위탁에게 재가하였고, 위탁 사후 최선에게 삼가함.
4녀장녕공주
(長寧公主)
불명? ~ ?위황후관국공(觀國公) 양신교(楊愼交)
소언백(蘇彦伯)[37]
양신교 사후 소언백에게 재가함.
5녀영수공주
(永壽公主)
불명? ~ ?위황후팽성군개국공(彭城郡開國公) 위회(韋鐬)[38]
6녀성안공주
(成安公主)
이계강(李季姜)? ~ ?불명위첩(韋捷)[39]
7녀영태공주
(永泰公主)
이선혜(李仙蕙)685년 ~ 701년위황후위왕(魏王) 무연기(武延基)700년 하가.
8녀안락공주
(安樂公主)
이과아(李裹兒)685년 ~ 710년위황후호국공(호國公) 무숭훈(武崇訓)
환국공(桓國公) 무연수(武延秀)[40]
무숭훈 사후 무연수에게 재가함.


4. 연호

중종(1차)원년
서력
(西曆)
684년
간지
(干支)
계미(癸未)
연호
(年號)
사성(嗣聖)
원년
중종(2차)원년2년3년4년5년6년
서력
(西曆)
705년706년707년708년709년710년
간지
(干支)
을사(乙巳)병오(丙午)정미(丁未)무신(戊申)기유(己酉)경술(庚戌)
연호
(年號)
신룡(神龍)
원년
2년3년
경룡(景龍)
원년
2년3년4년


참조

[1] 서적 Old Book of Tang
[2] 문서
[3] 문서
[4] 서적 vol 7 :zh:s:舊唐書/卷7 Old Book of Tang
[5] 문서
[6] 서적 Zizhi Tongjian 684-01-03
[7] 서적 Zizhi Tongjian 684-01-23
[8] 서적 Zizhi Tongjian 705-02-23
[9] 서적 Old Book of Tang 656-11-26
[10] 문서
[11] 서적 Zizhi Tongjian
[12] 서적 vol. 203, p. 6417 Zizhi Tongjian
[13] 서적 vol. 203 Zizhi Tongjian
[14] 서적 Zizhi Tongjian 684-02-27
[15] 서적 Zizhi Tongjian 698-10-24
[16] 서적 Zizhi Tongjian 698-10-26
[17] 서적 Zizhi Tongjian
[18] 서적 Bo Yang
[19] 서적 Zizhi Tongjian 705-02-20
[20] 서적 New Book of Tang
[21] 문서 공황후(恭皇后)
[22] 문서
[23] 문서 여릉왕비(廬陵王妃)/황태자비(皇太子妃)/순천익성황후(順天翊聖皇后)
[24] 문서
[25] 문서
[26] 문서 당창왕(唐昌王)/평은왕(平恩王)
[27] 문서
[28] 문서 황태손(皇太孫)/소왕(邵王)
[29] 문서
[30] 문서 의흥군왕(義興郡王)/위왕(衛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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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문서 북해군왕(北海郡王)/온왕(溫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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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문서 신도군주(新都郡主)
[35] 문서 의안군주(義安郡主)
[36] 문서 신녕군주(新寧郡主)
[37] 문서 장녕군주(長寧郡主)
[38] 문서 영수군주(永壽郡主)
[39] 문서 신평군주(新平郡主)
[40] 문서 패역서인(悖逆庶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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